2014년 1월8일, 누구보다 신뢰받아야 할 금융회사에서 고객 정보가 대량으로 빠져나간 사실이 드러났다. KB·롯데·NH농협 등 카드회사 3곳에서 대규모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세 회사에서 유출된 개인정보를 모두 더하면 1억건이 넘는다. 사실상 거의 모든 국민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셈이다. “한국 개인정보는 이제 공공재”라든지 “주민등록번호는 단군 이래 최대 수출품”이라는 냉소적인 목소리도 나왔다.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일어나자 정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여론이 끓어올랐다. 특히 주민등록번호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주민등록번호가 개인식별번호 역할을 하는데 전국민 주민등록번호가 털렸으니 이를 갈아 엎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유출된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해 제2, 제3의 피해가 생길지도 모르니 내 주민등록번호를 바꿔달라는 민원도 쏟아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1월27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주민등록번호가 무분별하게 쓰이는 문제를 꼬집고 대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 뒤로 주무부처인 안전행정부(안행부)가 제도 개편 논의를 시작했다. 공청회를 열고 시민단체 의견을 들으며 노력했다. 하지만 안행부가 8월1일 내놓은 주민등록법 일부개정안은 미봉책에 그쳤다. 안행부 안에 따르면 성폭행 피해자나 심대한 피해가 우려되는 이에 한해 주민등록번호를 바꿔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2월2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민병두·정청래·진선미 의원과 진보네트워크가 주최한 ‘개인정보 유출사고 1년, 주민등록번호 개편 논의 검토 및 비판’ 토론회에 참석한 법률전문가와 시민단체 관계자는 입을 모아 안행부가 내놓은 주민등록법 일부개정안을 비판했다.

2월27일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인정보 유출사고 1년, 주민등록번호제도 개편 논의 검토 및 비판' 토론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김기중 동서파트너스 변호사, 신훈민 진보네트워크 변호사, 사회를 맡은 한상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혜정 동화 변호사, 김상겸 동국대학교 법학과 교수, 김원규 국가인권위원회 사무관, 심우민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

▲2 월27일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인정보 유출사고 1년, 주민등록번호제도 개편 논의 검토 및 비판’ 토론회가 열렸다. 왼쪽부터 김기중 동서파트너스 변호사, 신훈민 진보네트워크 변호사, 사회를 맡은 한상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혜정 동화 변호사, 김상겸 동국대학교 법학과 교수, 김원규 국가인권위원회 사무관, 심우민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

이미 유출된 주민등록번호는 포기하고 살라고?

신훈민 진보네트워크센터 변호사는 정부가 개인정보 유출 이후 내놓은 대책이 모두 처벌 강화와 규제 강화에만 몰려 있고, 이미 유출된 주민등록번호를 어떻게 할지는 고민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신 변호사는 안행부가 시민단체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크게 바뀌지 않은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지난해 말 국회에 제출한 것은 책임을 피하려는 보여주기였다고 비판했다.

“유츨된 주민등록번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을 아무것도 안 했다는 비판을 피하려고 2014년을 넘기기 전에 뭔가 해야 한다는 것으로 보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듭니다.”

만능키 주민등록번호 대신 목적별로 식별번호 따로 만들자

김원규 국가인권위원회 사무관은 주민등록제도가 IT가 만연한 지금 상황을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민등록번호의 위험성이 극적으로 커졌다고 설명했다.

주민등록번호은 크게 4가지 기능을 한다. 1963년 주민등록번호를 도입할 때 목표는 식별 기능이었다. 남한 주민과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을 솎아내는 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민등록제도를 만든 이유다.

두 번째로는 그 사람이 본인임을 확인하는 인증 기능을 한다. 은행에서 처음 계좌를 열 때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면 사진과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하고 계좌를 열어주는 이유는 주민등록증이 그 사람이 그 사람임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기능은 묘사다. 주민등록번호에 생년월일과 성별, 출신지역이 들어가기 때문에 번호만 봐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얼추 추론할 수 있다. 북한 이탈주민은 경기도 안성 소재 하나원에서 적응교육을 받고 주민등록번호를 받는데, 이때 뒷자리 두 번째 자리부터 네 번째까지 3자리수로 안성을 뜻하는 ‘252’번을 받는다. 그래서 주민등록번호만 보고도 탈북자임을 알아채고 이들을 폄훼하는 일이 생긴다.

네 번째 기능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연결 기능이다. 정부나 기업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때 주민등록번호를 다른 데이터를 연결하는 키값으로 쓴다. 그래서 거꾸로 주민등록번호만 있으면 그 사람에 관한 정보를 캐낼 수 있는 문제가 생긴다.

김원규 사무관은 주민등록번호가 애초 취지보다 더 널리 쓰이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가. 김 사무관은 모든 곳에 쓰는 주민등록번호 대신 목적에 따라 자기 식별번호를 따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주민등록번호는 만들 때 취지에 맞게 주민등록 관련 행정업무나 사법업무에 한정해서 쓰라는 겁니다. 다른 공공영역에는 목적별 자기 식별 번호를 도입하라, 이게 핵심입니다. 또 현행 주민등록법을 개정해서 주민등록번호를 여러 곳에 쓰지 못하게 금지하는 조항을 포함해야 합니다. 그걸 금지하지 않으면 다른 공공영역에서 목적별 자기식별번호를 도입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주민등록번호, 이미 바꿀 수 있어

이혜정 법무법인 동화 변호사는 금융사고로 개인정보를 유출당한 피해자에게 주민등록번호를 바꿔주지 않는 일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꼬집었다. 이혜정 변호사는 2013년 ‘기타 행정착오’를 사유로 바뀐 주민등록번호가 242건에 달한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1년 전만 해도 10건 뿐이었던 행정착오가 1년만에 24배 늘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갑자기 주민등록번호 제도에 새로운 문제가 생긴 탓일까. 아니다. 이혜정 변호사는 세종특별자치시 행정번호가 ’44’로 부여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세종시에서 태어난 여자아이 주민등록번호 뒷번호가 444로 부여되자 부모가 죽을 사(死)가 연상된다며 행정심판위원회에 주민등록번호를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위원회는 이를 승인했죠.”

이혜정 변호사는 이 사례가 정서적·감정적 이유로 주민등록번호를 바꿔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번호 부여 자체에 착오나 오류가 없었고, 북한 이탈 주민이나 성전환 수술 등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4’라는 숫자가 겹쳐서 불길하다는 감정적인 요구만으로 주민등록번호가 변경된 겁니다.”

이 변호사는 정서적인 이유만으로는 주민등록번호를 바꿔주면서, 개인정보 유출 사고 피해자에게는 바꿔주지 않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금융사고 등으로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되면 설령 이로 인해 실제로 피해를 입거나 2차 피해 위험성을 비롯한 재산권 피해 또는 잠재적인 피해 우려만으로는 주민등록번호를 바꿔주지 않습니다. 전국민 주민등록번호가 털린 마당에 주민등록번호를 바꿔줄 경우 행정업무가 과도하게 생기고 사회적 혼란과 예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주민등록제도, 점진적으로 고치자

이 자리에 함께한 김종한 행정자치부 주민과 과장은 주민등록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단박에 바꾸기에는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려는 것이 개정안의 취지라고 해명했다.

“주민등록번호는 국가 근간을 이루는 시스템이고 갑자기 바꾸면 혼란이나 예측하지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처음에는 제한적으로 수정하는 제도를 운영해보면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지켜보자는 겁니다.”

김종한 과장은 개명 절차가 간소화된 점을 사례로 들었다.

“지금은 가정법원에서 이름을 바꿔주는데, 예전에는 되게 어려웠습니다. 개명 절차를 도입해 하나둘 하다보니 쉽게 바꾸게 해줘도 큰 문제가 안 생긴다는 걸 확인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상당히 폭넓게 변경해주는 걸로 압니다. 우리도 이 점을 참조해 제한적으로 하는 부분을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김 과장은 주민등록번호 변경위원회에 사안에 따라 변경 여부를 판단하도록 맡길 계획이라고 밝혔다. 법 조문에 규체적인 변경 사유를 못 박으면 일괄적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안에 따라 유연하게 판단할 길을 열어뒀다는 설명이다.

“주민등록번호 변경위원회에 위원으로 참가하신 분들이 판단하도록 그들에게 맡기자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변경 사유 해석이) 아주 좁아질 수도 있지만, 아주 넓어질 수도 있습니다. 향후에 국회 입법 과정에서 넓어질 수도 있을 거고요. 우리 입장은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 […] 사회 변화와 국회 입법과정 등을 종합적으로 보면서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http://www.bloter.net/archives/221514

Posted by 루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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